"그래서 이번 해의 마무리는 어떻게 하시… 성, 선생님?"


안경을 고쳐쓰며 맞은편의 사내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던 기자는 벌떡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혀를 씹었다. 자신의 기자인생 일생일대의 대물과 만나는 중인데 혀를 씹다니. 제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그가 벌떡 일어난 이유를 찾기 위해 그와 같은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선생님…?"

밤낮이 제멋대로인 화가의 시간에 맞추어 인터뷰 하러 나온 탓에 창 밖은 어둠으로 그득했다.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대신 야근을 하는 수많은 빛들이 별들처럼 날아와 꽂혔다. 

다크서클이 짙게 자리잡은 초췌한 얼굴을 한 곳을 향해 돌린 채 움직이지 않던 그는 덩달아 같이 일어난 자신의 매니저를 담 넘듯 넘어 무엇에 홀린듯 카페를 뛰쳐나갔다. 그의 움직임에 주춤하던 매니저는 맞은 편에 앉은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곤 다급히 그의 뒤를 따라 달려나갔다.

'선생님 또 무…!'

이 시대의 가공되지 않은 보석이라 불리우는 화가, 몽키.D.루피. 그는 첫 전시회부터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온 마력을 가진 예술가였다. 특유의 선 쓰임과 화풍에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로부터 집중조명을 받고있는 젊은 화가. 그는 때마침 밤샘작업을 마치고 숨만 겨우 쉴 정도의 체력으로 이 인터뷰에 끌려나온 것이었다. 그가 달릴 힘이 없다는 사실은 매니저가 집에서부터 카페까지 거의 업다시피 해서 데려왔다는 것으로 증명될 터. 

그러나 지금의 그는 어디에 숨겨놨던 힘인지 건장한 체격의 매니저마저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화가 루피의 매니저생활 4년의 바르톨로메오는 루피가 엄청나게 질주하는 두가지 경우를 알고 있었는데, 하나가 고기류의 식사를 앞에 뒀을 때. 하나가 소재를 발견했을 때였다. 야밤에 고기를 먹을 리가 없으니 아마 두번째의 이유겠지. 바르톨로메오는 헉헉거리며 발빠른 선생님의 뒤를 좇아갔다. 

이윽고 익숙한 뒷통수가 야경을 뚫고 눈에 들어왔다. 멈춰선건가. 단숨에 횡단보도를 넘어버린 루피때문에 헐레벌떡 뒤따라온 그는 갑자기 풀썩 쓰러지는 루피를 보고 놀라 빠르게 달려갔다. 

"선생님… 선생님!!"
"…하아?"

위에서 들려오는 낮은 한숨소리에 바르톨로메오는 루피를 끌어안고 제 앞의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별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남자. 야근 중 밤참을 사러가는건지 담배를 사러가는건지 피로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젋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 

'이 사람인가.'

평범한 회사원. 굳이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늦은 나이로 입사해서 젊은 상사들에게 눈치 꽤나 보일법한 부하랄까. 바르톨로메오는 그런 자의 도대체 어디에서 소재거리를 발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삼일은 입은듯한 와이셔츠와 구깃구깃한 넥타이.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바지하며 구두도 험하게 신는 듯한 사내. 그다지 독특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 바르톨로메오는 도저히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생님의 눈은 틀린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뭡니까?"

그는 피로한 기색이 절절 묻어나는 목소리로 성가시다는 듯한 태도를 비추었다. 바르톨로메오는 약간 울컥 했으나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다. 입에 물고만 있던 담배를 손으로 내려쥔 그를 향해 바르톨로메오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하지만,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제 팔 안에서 기절해 있는 루피를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바르톨로메오를 보며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바쁜데. 후우 하고 퍼지는 입김과 함께 그의 작은 불평이 밤하늘로 흩어졌다. 







루피를 잠시 벤치에 뉘이고 제 옷을 덮어준 바르톨로메오는 냉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꺼냈다.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다시 한번 울컥 했으나 꾹 눌러참고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건네주는 손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던 그는 반대쪽 다리에 체중을 실으며 한 손으로 명함을 건네받았다. 

짜증나는 남자다… 바르톨로메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명함을 보고 눈에 살짝 이채를 띈 사내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데면데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벤치에 누워계신 분이 이름 있는 화가이고, 당신을 모델로 쓰고 싶어한다고. 페이는 후하게 드릴테니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저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자신의 스크랩북을 보여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업용 포르노 같은 건 아니겠지?"
"그 무슨…!! 그런 것과 비교하다니 루피 선생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아님 됐지."

시큰둥하게 내뱉은 그의 말에 말대꾸 해 주고싶은 기분이 목젖까지 올라왔으나 그는 선생님의 중요한 모델이었다. 이렇게나 힘이 없으면서 미친듯이 달려간 걸 보니 백발백중 엄청난 것이 나올 테였다. 선생님의 그림은 바르톨로메오의 삶의 이유이자 에너지였다. 자신의 영웅이 애타게 바란다면 만족시켜 주고 싶은 것이 팬의 도리. 그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그에게 부탁했다. 명함의 번호로 연락주시면 이쪽에서 먼저 만나러 가겠다고. 

끝까지 대충대충 듣는 듯 하더니 그는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까딱이며 멀어져갔다. 바르톨로메오는 루피를 다시 안아올렸다. 기자를 너무 기다리게 했지만 오늘은 인터뷰 하기 틀린 듯 싶었다. 다시 스케쥴을 짜야하는 그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크로… 크로커다일…은?"
"예?"
"모델 말이야, 모델… 어딨어?"

눈을 뜨자마자 웬 낯선 이름을 불러대는 선생님때문에 바르톨로메오는 제 수첩을 뒤져가며 크로커다일이라는 사내를 찾았지만 수첩에는 적혀있지 않았다. 그게 누굽니까? 그가 루피의 곁에서 기름이 튀지 않도록 고기를 뒤집으며 묻자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루피.



*

"모델, 모델이 되어줘…."
"뭐야? 누구야?"

날카로운 담배냄새. 담배냄새에 베일듯한 기분을 느끼며 루피가 그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제법 키가 크고 몸도 다부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번뜩이는 느낌. 그래, 그 느낌 하나가 자신을 이리도 달리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가 필요해. 이 남자를 그리고 싶어. 내 모델이 되어줘. 말을 다 전하지 못하는 그의 몸에서 힘이 축축 빠졌다. 전날의 여파가 거세게 몰아쳤다. 젠장, 어제 밤샘을 괜히했어. 이 남자를 만날 줄 알았다면 체력을 아껴뒀을텐데. 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시야가 흐릿해지며 남자의 모습이 울렁였다. 

"루피… 당신 이름은? 이름… 제발…"

무릎 아래로 힘이 빠지며 보도에 무릎을 꿇는 자신이 느껴졌다. 한층 낮아진 곳에서 올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은 아름다워, 루피는 거대한 자연에 마주한 작은 인간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둑한 하늘과 눈부신 야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은 그에게 어떤 것을 끊어지게 만들었다. 눈 앞이 검어지고 밝아짐을 반복했다. 이름, 이름을 들어야 해. 

"이봐, 당신 괜찮아?"
"이…이름…."
"크로커다일이다. 이봐! 정신차려!"

몸이 이리저리 휘청이는 듯 하더니 바닥이 아까보다 가까워졌다. 까무룩해지는 정신 한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바르톨로메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천장 위로 기억을 되살리는 루피를 일으켜세운 건 갓 다 된듯한 밥 냄새였다. 배에서 꼬르륵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밥 가져 올테니 손으로 집어먹지 마시고 젓가락 꼭 쓰세요, 선생님."
"으응."
"저 봐. 내 말은 콧등으로 들으시지."

응이라고 대답했으면서도 접시 위에 놓여진 고기를 기어코 손으로 집어먹는 루피를 보며 혀를 쯧쯧 차는 바르톨로메오. 그가 밥을 제대로 퍼 왔을 땐 이미 접시 위의 고기가 모조리 루피의 입 안으로 사라진 상황이었다. 

"밥!!!"
"네네, 여기 있다구요."

바르톨로메오가 건네는 그릇을 받아들고 흡입하다시피 밥을 한공기 해치우더니 고기를 굽는 그를 힐끗 보곤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달각거리는 소리와 밥 냄새가 흘러나오더니 밥을 고봉으로 쌓아서 오는 그를 보고 피식 웃은 바르톨로메오는 이틀간 잠만 잤다고는 말 못하겠네, 라며 중얼거렸다. 워낙 날짜개념 없이 사는 그라서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맞은 편 방에 흐릿하게 보이는 지난 며칠간의 밤샘작업이 보이자 그는 제가 그린 것도 아니지만 뿌듯했다. 제 선생님의 작업에 힘이 될 수 있다니. 고기를 불판 한가득 얹으며 헤실헤실 솟아나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그의 귀로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려왔다. 

"저거, 버릴거야."
"예??!!"

고기를 입 안에 한가득 우겨넣고 밥을 우물거리며 루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 방에 있는 그림, 맘에 안들어. 찢을거야. 그 말에 새하얗게 질린 바르톨로메오를 눈치채지 못한 그는 남은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불판을 뒤적였다. 

"선생님, 저거 내시기로 하셨당께요? 다다음 주에!!"
"너 또 사투리나온다, 바티."

히히히 하고 웃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바르톨로메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저걸 왜 버리세요, 버릴 거면 저 주세요, 그보다 다다음 주에 내기로 했다니께요? 그의 복잡한 마음 속의 말들을 다 알아듣지 못한 루피는 히히 웃으며 치직소리를 내는 불판위의 고기를 한 점 한 점 뒤집었다. 오늘도 고기냄새!!! 라고 외치는 그의 미소가 해맑았다. 









"왜 아직도 연락 안 와?"
"그러게요… 선생님 이름은 검색하면 금방 나올텐데… 선생님의 모델을 하는게 얼마나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일인지는 다섯 살 꼬마라도 알텐데!"

에이. 루피는 이젤 앞에서 인중에 연필을 얹은 채 의자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점 하나 찍은 하얀 캔버스가 있었다. 뭘 그리려고 해도 의욕이 안나는 탓에 빈둥빈둥거리는 루피를 보다못한 바르톨로메오가 저번 그 카페 앞 횡단보도까지 나갔다 온 것도 벌써 수십차례에 달했다. 뿌우옇게 김이 서린 창 밖으로 너덧 남아있던 낙엽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루피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도무지 뭘 그려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 모델이라도 불러올까요?"

그가 부른다 하면 발벗고 나설 모델들이 줄을 섰을텐데. 바르톨로메오의 조심스런 말에도 루피는 입술만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아니면 그리고 싶지 않아. 

루피의 이상한 고집이 시작됨을 눈치챈 바르톨로메오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주전자에서 물이 팔팔 끓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김 사이로 나부꼈다. 이미 저번 그림은 찢어버린 지 오래. 아무래도 제 기간에 맞추기는 글렀는 듯 싶었다. 








일주일이 흘렀다. 코앞으로 다가온 마감에 발을 굴러도 나오지 않는 건 나오지 않고, 연락 또한 없었다. 루피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고 혼자서 끙끙대며 스케치북을 들곤 그 남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그려대고 있었다. 방에 처박혀 밥과 낙서만 반복한 지 오늘로 딱 육 일 째였다. 

육시럴 놈. 바르톨로메오는 들고 있던 오징어포를 질근질근 씹으며 그 남자에 대한 분노로 몸을 불살랐다. 이러다가 제 선생님께 슬럼프라도 오지 않을까 안달복달하며 거실을 오가는데 핸드폰이 지잉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일주일 째 진동 및 벨소리에 간 졸이며 살던 그라 진동소리가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며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등록되어 있지 않는 번호였다. 

요 며칠간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이 핸드폰으로 걸려온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꿀꺽 침을 삼키곤 조심스레 통화버튼을 눌렀다. 후우-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 얼마전에 명함 받은 사람인데.
"!!!!!!!"

그는 공중으로 펄쩍 뛰다가 장식물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통화하면 선생님이 엄청 신경쓰시겠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루피의 작업실을 나갔다. 루피는 그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방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급하게 건물 밖으로 뛰어나온 바르톨로메오는 헉헉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아
"전화 걸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그 쪽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계세요…."
- 모델, 여유가 있다면 가끔씩은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거만한 듯한 말투. 말로는 감사하다고 하고 있지만 역시 바르톨로메오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급한 건 다음 주 전시였다. 중요한 전시여서 어떻게든 펑크내지 않기를 바라는 매니저의 입장에선 저절로 공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보다 급한건 선생님 쪽이었다. 자신의 우상인 선생님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 꼴은 도저히 못 본다, 라고 굳게 마음먹은 그의 입에서 미팅 약속이 나왔고 의외로 어렵지 않게 시간을 맞춘 그는 일각을 다투는 그의 면접을 최대한 당겨 오늘 오후 8시에 만나기로 했다. 

일단 면접을 보고 제 선에서 허락되는 한도 내의 사람을 루피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역으로 선생님이 모델을 원했다. 일의 모든 순서는 역방향이 되었고, 일단 OK를 받은 상태에서 면접을 보는 엉망진창인 상황. 머리를 쥐어뜯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느새 나와서 로봇을 조립하고 있는 루피가 보였다. 루피가 그를 보자마자 해맑게 웃으며 달려왔다.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그의 멱살을 쥐고 한껏 끌어당긴 루피가 시시싯하고 웃었다.

"언제부터 같이 일해?"
"…그가 선생님이 원하시는 일정에 맞춰주길 바래야죠. 가능하다면 빨리요."

이런 눈치는 귀신같으시군. 방방 뛰며 활기를 찾은 듯한 루피가 기분이 좋은 듯 찬장에서 과자를 우르르 쏟아내더니 폭풍같이 흡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헤실헤실 웃던 바르톨로메오는 늘 건네오던 계약서와 조금 다른 것을 준비하기위해 제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 뒤로 박스 과자 네 통과 봉지과자 여섯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루피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과자 봉지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안정을 찾은 공기가 과자 봉지를 기웃거리며 흘렀다.







오후 7시 50분.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아 바르톨로메오는 그의 몫 까지 주문해두었다. 아메리카노면 되겠지. 커피를 달고 살 것 같은 피로함을 그에게서 느꼈기에 아무 생각없이 주문했으나 꽤나 제 선택에 만족한 바르톨로메오가 흐뭇하게 웃으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달달한 캬라멜 향이 카페 안을 맴돌았다. 오랜만에 당을 채울 생각으로 들뜬 그가 발을 작게 동동거리며 자신의 음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챠르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렸다. 긴 남색 코트를 입고 녹색 목도리를 칭칭 두른 사내가 들어왔다. 그 남자였다. 

바르톨로메오는 그를 부르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원체 독특한 머리색을 가진 그를 알아보기는 간단했고, 그 남자는 곧장 그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사내를 보면서 떠올린 생각은 두 가지였다. 보폭이 크고 시원하다. 키가 크다.

주위에서 저만큼 큰 사내를 본 기억이 드물었는데, 남자는 자신 못지않게 키가 컸다. 일주일 전은 경황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검은 코트를 빼입고 걸어오는 폼새가 뭇 모델 못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르톨로메오는 그에게 모델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이런.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루피 선생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바르톨로메오 입니다."
"크로커다일 입니다."

바람에 휘날려 아무렇게나 내려온 머리를 대충 쓸어올리며 대답하는 크로커다일의 앞에 그가 수첩을 내밀었다. 스케쥴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다이어리였다. 크로커다일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짧게 훑어보았다. 그의 눈이 내용을 대충 훑었다 싶자 바르톨로메오가 제가 들고 있던 펜을 빨간색으로 바꾸며 딸깍거렸다. 

"갑작스러워서 죄송하지만, 최대한 빨리 만나뵙고 싶어해서 그런데 괜찮은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긴 했지만 일주일 동안 끙끙대던 선생님을 더 이상 두고볼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다. 크로커다일을 흘깃 쳐다보자 그는 왼손으로 턱을 괴곤 반대 손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손가락이 길고 큼직했다. 톡톡 두들김을 반복하던 손가락이 검은 코트의 주머니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더니 핸드폰을 꺼내어 이것저것 눌러댔다. 흐음. 낮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달콤한 음료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르톨로메오의 앞에 놓여지자 코로 한껏 향을 음미한 그가 초콜렛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크로커다일의 손가락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급한 일정이 있습니다."
"음?"

되물어오는 크로커다일을 보며 바르톨로메오가 빨간 펜으로 스케쥴러에 선을 쭉 그었다. 내일부터 일주일 간의 일정. 모두 붉은 선을 그은 그가 펜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반쯤 뜬 크로커다일의 눈을 바라보며 일주일 후에 꼭 제출해야하는 그림이 있는데 선생님이 당신 아니면 안그리시겠답니다, 라고 말하자 그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떠졌다.

"크로커다일 씨의 일정을 우선시 할 겁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껜 지금 당신이 무척이나 필요하니까요."

제 앞에 놓여진 아메리카노를 물끄러미 보던 크로커다일이 벌떡 일어나더니 카운터 옆에서 시럽을 챙겨들고 왔다. 시럽을 세 통 털어넣는 걸 보고 단 걸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우유와 설탕까지 세 통씩 털어넣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마지막 설탕을 털어넣고 섞지도 않은 채 그걸 빤히 바라보는 크로커다일. 그가 가져온 침묵의 무거움에 눌려 바르톨로메오도 조용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귀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의자 끄는 소리, 발 걸음소리, 커피머신 소리… 각종 소리에 파묻힌 침묵을 깨고 크로커다일이 입을 열었다.

"주말엔 시간이 괜찮습니다."

그 말에 주말의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다. 저번에 못다한 인터뷰가 주말에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르톨로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와 알아야 하는 주의사항을 기록한 종이를 건네고 찾아와야 할 장소의 주소를 적어주곤 전화번호를 휘갈겨 썼다. 마침 그도 멀지 않은 곳에 산다고 해 굳이 데리러 가기까진 안 해도 될듯 해 바르톨로메오는 한숨 놓았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가 자리를 일어서자 바르톨로메오도 엉겁결에 몸을 일으켰다. 2미터에 가까운 두 거한이 갑자기 일어나자 카페의 시선이 모조리 쏠려 엉거주춤하게 인사를 건넨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카페 문을 나간 후에야 아메리카노를 단 한 입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먹지도 못할 정도로 달아진 아메리카노를 보니 앞으로 순탄하지만은 않을 듯한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그는 캬라멜 마끼야또를 두 잔 테이크아웃하곤 루피가 기다리는 작업실로 돌아갔다. 










"안녕하십니까."


무뚝뚝한 얼굴은 변하지 않은 채 조금 쌀쌀한 기운을 안고 들어온 크로커다일은 쾌적해보이는 거실로 안내되어졌다. 색색깔의 소파가 화려하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것과는 달리 흰 색으로 통일된 벽지는 꽤나 독특한 맛을 주었다. 크로커다일은 개중 녹색의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 걸려있는 강렬한 풍의 노을 그림과 그 그림을 찢고 박혀있는 가짜 말 장난감. 명품을 망친 기분이 들면서도 오묘하게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이 또한 화가의 작품일까? 크로커다일은 피식 웃으며 바르톨로메오가 내어오는 차와 과자를 받아들었다.

"선생님은 곧 내려오실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르톨로메오는 그날 이후부터 엉덩이를 바닥에 못 붙이고 있는 루피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꽤나 개인적인 웃음이라 크로커다일은 그 미소를 못 본척 했다.

쿠당탕당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계단에서 사람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조금 젊어보이는 사내가 등장했다. 피를 흘리며 등장한 사내를 본 바르톨로메오가 기겁을 하며 티슈를 뭉텅이로 뽑아가는 걸 보니 저 자가 화가인 듯 했다. 

루피의 피를 부산스럽게 닦아주고 응급처치를 하는 바르톨로메오와는 달리 나름 침착한 표정으로 쇼파에 주저앉는 그.

"…하?"
"선생님, 맞은편에 앉으셔야죠."
"앗, 그런가."

크로커다일의 옆 쇼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르톨로메오의 말에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 앉는 루피. 크로커다일은 그가 꽤나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긴, 예술가들이 제정신이면 그건 또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한눈팔고 있다 마주본 젊은 사내의 두 눈은 생각외로 깊고 잔잔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금방 인정했다. 

"크로커다일 입니다."
"루피."

선생님, 존댓말! 옆에서 바르톨로메오가 끼어들었지만 루피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그러더니 제 이마에 붕대를 감는 바르톨로메오를 밀어내고 크로커다일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밀려난 바르톨로메오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붕대감기를 완성했고 붕대를 둘둘 만 채 루피는 짙은 눈으로 크로커다일을 바라보았다. 

저를 그리고 싶다 한 화가였다. 크로커다일은 그에 대해서 조금은 검색해보았었다. 그가 유명한 화가라는 것도 알고, 그의 그림들도 몇 번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매스컴에서 그렇게 띄워주는 신인 화가라.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길래 매스컴에서 그렇게 들끓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만나고 나니 왠지모르게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크로커다일의 생각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와중, 갑작스럽게 끼어든 밝은 목소리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악어! 이제 악어라고 부를거야!"
"악...어?"
"당신의 별명이에요."

악어악어 노래를 부르며 쇼파를 벗어나 방방 뛰는 루피를 보며 아연한 얼굴로 읊조리자 옆에 있던 바르톨로메오가 두근거리는 얼굴로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별명이라고? 

"선생님은 모든 모델에게 별명을 붙여주세요. 모델과 가까워지기 위한 선생님만의 방법이에요."

바르톨로메오는 빙글빙글 웃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나머지는 선생님이 알아서 하실테니까, 라며 그와 화가만을 거실에 남겨두고 어딘가를 서둘러 갔다.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화가를 보려고 하자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있는 루피.

"악어. 악어어."
"...후,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편한대로 불러! 그보다 모델 경험 있다고 그랬지?"
"일단은."

시시싯 웃는 그의 얼굴이 참 맑다고 느끼며 그가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끌려간 크로커다일은 의외로 엄청난 작업실의 규모에 놀랐다. 그러나 작업실이 하나가 아닌 듯 그 곳을 지나 어느 방으로 들어간 루피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조금 넓다싶은 방에 몇 개의 이젤, 그리고 모델이 서는 듯한 낮지만 넓은 발디딤대와 세면대. 그리고 침대가 하나 쇼파가 두어개, 의자가 차곡차곡 쌓여진 채 방 구석에 놓여져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어서 머뭇거리고 있자 루피가 도도도 달려와 그를 끌어당겨 쇼파에 앉혔다. 그러더니 나는 듯이 이젤로 다가가 뭐를 꿈지럭 거리더니 그려대기 시작했다. 사삭 사사삭 하는 연필인지 뭣인지 모를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붓을 들고 가볍게 터치하기 시작하는 그. 크로커다일이 경험해본 모델이라는 것은 잡지 모델 같은 경우였기에 그림의 모델로 서는 것은 영 낯설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크로커다일을 보고 스케치북 몇 장을 순식간에 넘긴 루피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의자를 지익 끌었다.

이젤에 가려졌던 루피의 얼굴이 마주보여서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자 루피는 바퀴달린 의자로 갈아타더니 돌돌돌 바퀴를 굴려 그가 앉은 쇼파 근처로 왔다. 약 70센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춘 루피는 그의 주위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집 안이라고 해도 약간 쌀쌀했기에 코트를 벗지 않은 그는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그를 봤으나 루피는 진한 눈빛으로 그를 살피며 서너바퀴를 더 돌았다. 

"뭐, 해야할 일이라도?"
"으히으음."

루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크로커다일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렇게 두어 바퀴를 더 돈 루피가 조금 떨어지더니 다시 이젤로 돌아가 뭔가를 슥삭댔다. 뭘 그리는 건진 몰라도 사람을 그린다고 치기엔 너무 빠른 터치. 





그 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다가온 루피가 바닥에 누워 크로커다일을 올려다보며 비척대자 어디선가 나타난 바르톨로메오가 루피를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입에 고기를 한 점 물려주었다. 고기 한점에 후다닥 어딘가로 달려가는 루피를 멍청하게 쳐다보자 바르톨로메오가 밖으로 안내해줬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선생님은 굉장히 괴짜세요."
"그런 것 같군요."

모델로서의 유의사항이라는 항목이 있었었지. 크로커다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바르톨로메오가 넘겨준 서류 중 하나에 있었던 유의사항 중 하나가 화가가 괴짜이므로 그에 날선 대응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달 것, 이었다. 그걸 보고선 모델이라면 그쯤은 이해하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오늘 화가를 보자 그 내용이 화악 와닿았다. 

전시까지는 오 일이 남았다. 그동안 한번만 더 와줄수 있겠냐는 부탁에 크로커다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순순한 대답에 놀란 건 오히려 바르톨로메오 쪽. 회사원이 아니었던건가? 그가 혼자 중얼거렸지만 크로커다일은 그 새를 못참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벌써 하늘은 어둑해 곳곳의 가로등들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물든 거리를 한번 내려다 본 크로커다일이 고개를 들어 집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사람의 그림자가 그 어디에도 비치지 않는 밝은 집 안. 사는 이는 화가와 그의 매니저 뿐일까. 크로커다일은 주머니에 만져지는 담배갑을 꽉 잡았다. 

"그럼 삼일 후에 뵙죠."
"알겠습니다."

짤막한 전달사항 이외에는 특별히 없는 듯 바르톨로메오는 그를 보내주었다. 크로커다일은 그가 자신을 썩 마음에 들지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오늘 일이 끝나고 나면-일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을 붙잡고 무어라 몇 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입을 대지 않았고 조용히 그를 보내주었다. 커다란 현관을 나섰다. 쌀쌀한 바람이 코트 자락을 쑤시고 들어와 그는 목도리를 고쳐매었다. 주머니에 담배가 있었지. 꺼내 본 담뱃갑의 안엔 한 개비의 담배가 남아있었다. 어두운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자신들의 안락한 집으로 들어가 하하호호 따스한 저녁을 보내고 있을 터. 크로커다일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쓴 맛이 혀를 돌아 입안으로 퍼졌다. 그는 끝내 불을 붙이지 않았다. 










-------------------------

안 가벼운거 써보려고 하니까 손에 가시가 돋...
제목을 빨리 지어야 할 텐데.....또르륵
나라도 사랑한다 내 작품 흑흑





+ Recent posts